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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崔瑩:1316-1388)
고려 말기의 명장이며 청빈한 충절의 표상이다. 무민공 최영장군은 1316년 최청의 현손인 사현두정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어린 영에게 "너는 앞으로 관리가 되어도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고, 황금 보기를 돌같이하라" 고 가르쳤다. 1352년 조일신난을 평정하여 호군에 이르며, 원나라의 요청으로 장사성의 난을 토벌하고 압록강에서 홍건적을 격퇴하는 등 왜구의 침략을 막아내고 요동정벌을 시도하였던 고려말의 명장이다.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에게 잡히어 고봉현(지금의 고양군)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73세를 일기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 내가 살아오면서 한 번이라도 사리사욕을 챙겼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요, 오직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만 일해 왔다면 내 무덤에 풀이 단 한포기도 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과연 장군의 무덤에는 풀이 한 포기도 나지 않아 붉은 무덤이라고 불렀다. 홍북면은 노은리에 조선왕조 세종의 사육신 중 한 분인 매죽헌 성삼문학사와 더불어, 대인리에 최영 장군 출생한 영지로서 사당이 건립되어 있다.

성삼문(成三問:조선 세종)
창녕인 성삼문의 자는 근보이고, 호는 매죽헌이다. 1418년(태종 18년) 아버지 도총관 성승과 어머니 박씨의 장자로 홍북면 노은리 적동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해산할 때에 공중으로부터 "낳았느냐"라고 묻는 소리가 세번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삼문"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어려서부터 천자가 단정하고 총명하며 성품이 강직하더니 세종 무오년에 문과에 합격하고, 정묘년에는 중시에 장원하여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세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집현전 학사가 되어 신숙주등과 함께 어학과 음운을 연구하였고 사성을 연구함으로써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기여하였다. 군에서는 최영, 성삼문 생가지 정비를 위해 부지매입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용운(韓龍雲:1879-1944)
고종16년(1879) 8월 29일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이라는 곳에서 청주한씨 서원군 한명보의 후손인 부친 한응준과 모친 온양방씨의 차남으로 출생한 선생은 어릴때 이름은 유천(裕天), 본명은 정옥(貞玉), 불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 (卍海, 혹은 萬海)라 한다. 6세부터 성곡리의 서당골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라 칭송이 자자하였다. 26세에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불문에 입도하여 경악의 대가로 명승강사 가 되었다. 1910년에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등을 반대 철폐하고 33세에 만주로 망명 하여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등의 지사들을 만나서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1월에 최린과 상의하여 독립운동을 적극 추진 할 것을 결의 하였으니 이것이 3.1 만세운동의 발단이 되었으며,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보완하였다. 3.1운동 전후에 걸쳐 만년기 까지는 불교대전,불교 유신론,채근담강의, 님의침묵 등을 저작하고 유심지, 불교지를 발간하였다. 선생은 민족독립,불교유신,자유문학 의 3대 사상가로서 절의의 행적을 남기고 1944년 6월29일(음 5월 9일)서울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별세하였다. 결성면 성곡리 한용운 생가지에는 생가복원에 이어 사당을 건립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였으며, 주변 정비사업을 계속 추진중에 있다.

김좌진(金佐鎭:1889~1930)
호는 백야요,고종 26년(1889) 음 11월 24일 갈산면 행산리에서 출생하였다. 18세때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노예해방의 첫 기록을 남겼다. 15세가 되던 해는 대대로 살아오던 80칸이 넘는 집을 내놓고 작은 집으로 옮긴 다음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었는데, 이것은 우리 지방에서 신학문을 배울 수 있는 첫 기록이다. 그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기호흥학회라는 장학단체를 설립하여 지방의 유망한 청년들을 선발, 서울 유학을 시키기도 하였다. 20세 때에는 이봉창과 같이 서울에 고아원을 설립하여 무의무탁 고아들을 양육하는 한편, 한성신보의 이사로 취임하였고, 관철동 대관원자리에 이창 양행과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설립하였다. 31세가 되던 해에 서백리아에 출전중이던 일본의 가납연대 3,000명을 화 룡현 청산리로 유인하여 연대장 가납 이하 1,200명을 함몰시키고 천수백명 을 전상자로 만든 싸움이 저 유명한 1920년 10월 21에 있었던 청산리 작전 이다. 38세에는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취임하고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40세가 되던 해 군무서독변겸 북만군정서총사령, 한족총연합회 주석에 취 임하여 재만동포의 교육문제와 민생문제에 주력하는 한편,중국의 항일세력 과 연합전선을 결성하고 대일항전을 위하여 준비를 하던 중,1930년1월24일 하오 2시 중동 산시역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당원의 흉탄으로 일세의 풍운아 백야 김좌진 장군은 생의 장막을 내렸다. 홍성군에서는 1991년부터 김좌진장군생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생가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관리사 및 전시관을 건립했다.

한성준(韓成俊:1875-1941)
문화관광부가 명고수이자 한국무용의 대가로 근대 한국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한성준(韓成俊) 선생을 98년 9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1875년 아버지 한천오(韓天五)와 어머니 김씨(金氏)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민속 기예능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왔던 선생은 평생을 춤.장단과 함께 하며 이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림으로써 명고수로, 소리꾼으로, 한국무용의 대가로 평가받은 인물이다. 어릴 때부터 출중한 예술적 재능을 보인 선생은 6, 7세때부터 외조부 백운채(白雲彩)로부터 춤과 장단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4세때에 서학조(徐學祖)에게서 줄타기와 민속예능을 배우고 홍성을 비롯한 서산, 태안 일대의 각종 연회, 굿판에 참가하였다. 그후 생활이 어려워지자 선생은 전국 유랑길에 올라 독학수련으로 춤과 장단 등 민속 기예능을 연마한 후 31세때에 서울에 정착하여 원각사와 송만갑협률사 등에 명고수로 출연·활동하였고, 50세 후반이 되자 전문 전수교육기관인 조선성악연구회에서 그동안 배우고 추던 춤들을 무대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시도하는 한편, 1938년에는 전통춤 교육의 산실인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민속무용가를 배출하는 후진양성에 힘썼다. 선생은 또한 1935년부터 부민관(현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창작전통 춤 무대발표회를 가졌을 뿐아니라 승무, 태평무, 살풀이 등을 창안하였다. 또한 궁중에서 전습되던 정재와 민간에서 추던 민속춤을 바탕으로 왕의춤, 영의정춤, 좌의정춤, 급제춤 등 40여종의 다양한 춤을 창안.집대성함으로써 우리 전통춤의 새로운 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선생이 창안했거나 재구성한 춤들은 우리춤중에서 가장 탁월하고 정통성 있는 춤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중 승무(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와 태평무(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는 제자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으며,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보존되고 있다. 문화관광부는 한성준 선생의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충청남도 및 벽사춤아카데미 등 관련단체와 협조하여 학술세미나, 기념공연 등 각종 기념사업을 실시키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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